트벤테와의 최종전에서 선제골과 쐐기골을 작렬, 'Man of the Match'에 선정된 심 데 용부터 좁아진 입지를 받아들인 데 제우, 한 경기도 뛰지 못한 채 벤치를 지켰던 베테랑 수문장 그라프란트까지. 아약스가 통산 30번째 우승을 차지하는 데 보탬이 되지 않은 선수는 단 한 명도 없다. 분명히 공헌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그렇다고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 이들의 공로를 무시할 순 없을 것이다.
올 시즌 아약스는 때때로 선수들보다 경영진의 이름이 언론에 더 많이 노출됐을 정도로 다사다난한 한 해를 보냈다. 그러나 역시 선수들 없이는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 없다. 수아레스, 에마누엘손 등 핵심 선수들이 떠나고 감독이 교체되는 와중에도 우승을 거머쥐었다. 그런 만큼 특정 선수의 공로를 알리기보다는 인물 중심으로 10/11시즌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볼까 한다. 선수로 풀어보는 '2011 KAMPIOEN' 아약스, 시작.
반년 만에 해체된 다이나믹 듀오
지난여름 09/10 에레디비지 득점왕 엘 함다위가 아약스에, 그것도 불과 5m 유로라는 저가로 이적했을 당시 리그는 큰 혼란에 빠졌다. 지난 2년간 리그서 40골 이상을 터뜨린 유이한 이들이 아무런 장애물 없이 손쉽게 손을 맞잡았기 때문이다. 특히 수아레스의 다재다능함, 엘 함다위의 킬러 본능은 6개월 만에 해체된 수아레스-훈텔라르-술레이마니 조합보다 더욱 무시무시한 시너지를 낼 것이라는 기대를 받았다.
실제로 두 선수의 시너지는 대단했다. 수아레스는 득점 대신 - 입단 초기 그랬던 것처럼 - 찬스를 만들어내는 데 주력했고 엘 함다위는 이러한 지원 속에 연일 골을 몰아쳤다. 12경기 11골. 일찌감치 득점왕을 예약했고 헤렌벤전 발리슛, NAC전 로빙슛 등 PA에서 역대급 퍼포먼스를 보여주며 대단한 파괴력을 과시했다. 욜 체제의 핵심은 누가 뭐래도 '탈 에레디비지 듀오' 엘 함다위-수아레스였다.
그러나 이 듀오도 결국 6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해체되고 만다. 잦은 징계로 전력을 이탈하는 경우가 빈번했던 수아레스가 리버풀로 떠난 것. 설상가상으로 엘 함다위는 자신을 신임하던 욜이 떠나면서 입지가 급격히 변하고 말았다. 신임 감독 데 부르와 전술적 견해로 충돌, No.9 자리를 심 데 용에게 내주는 수모를 당했다. 백조에서 미운 오리새끼로. 그는 마치 6개월 전 AZ를 떠날 때처럼 그렇게 아약스에서 잊혀지고 있다.
프랭키의 아이들, 아약스를 바꿔놓다
아약스는 프랭키의 취임과 함께 많은 것을 얻었다. 그중에서도 두드러진 것은 유스의 부활이다. 사실 근년의 아약스는 '유럽 최고의 유스를 자랑하는 클럽'이라는 타이틀이 무색할 정도로 유스를 등한시했다. '7년 무관'이라는 불명예스러운 타이틀이 이들을 조급하게 만든 것. '유스의 질이 떨어진 것이 아니냐'는 비평도 따랐다. 그러나 그들이 팀을 떠나 리그서 남긴 족적들을 보면 이러한 질문에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유스 감독에서 승격된 프랭키는 달랐다. 부임과 함께 유스 선수들을 등용, 새판을 짰다. 이 과정에서 에릭센, 에베실리오, 보일리센 등 A1 시절 제자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꿰찼다. 욜 체제에서 겉돌던 에릭센은 프랭키 취임과 함께 No.10을 꿰찬 뒤 재능을 만개, 역전 우승에 기여했다. 한편 에베실리오와 보일리센은 혜성같이 등장, 수아레스와 에마누엘손의 공백을 메우며 새로운 희망으로 떠올랐다.
이 밖에도 욜 체제서 설 곳을 잃어 이적까지 고려했던 블린트, 미래가 불투명했던 외스빌리스가 당당히 A팀의 일원으로 자리를 잡았으며 카스티욘, 루코키, 로드니 스네이더, 오버톰 등이 A팀 훈련에 합류하는 신선한 장면도 자주 연출됐다. 하지만 무엇보다 반가운 것은 이것이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청사진이라는 점이다. 어쩌면 2011년은 아약스 유스의 부활을 알리는 해로 기억될지도 모르겠다.
아약스를 지킨 수호신
10/11 아약스 최다 득점자는 엘 함다위. 그는 리그서 13골을 넣었다. 이는 클럽 역사상 손꼽힐 만한 저조한 기록이다. 그럼에도 아약스는 우승 접시를 들어 올릴 수 있었다. 이는 전적으로 수비의 힘이다. 사실 전반기에는 09/10 후반기에 보여준 조직력을 재현해내지 못했다. 그럼에도 우승권에서 경쟁할 수 있었던 것은 '올해의 선수' 산정 점수서 압도적으로 1위를 질주하던 스테켈렌부르흐의 활약 덕택이었다.
사실 근년의 아약스는 수비 불안 때문에 우승을 눈앞에서 놓치는 경우가 많았다. 헤이팅하가 '올해의 선수'에 선정되고 스테켈렌부르흐가 연일 선방을 펼친 07/08시즌에도 동료가 도와주지 못해 많은 골을 내줘야 했다. 그러나 프랭키가 지휘봉을 잡은 뒤 수비는 급격히 안정됐고 스테켈렌부르흐의 클린-시트 횟수는 급속도로 쌓여갔다. 13회. 8경기나 결장했지만 미하일로프도, 이삭손도 그의 기록을 따라잡진 못했다.
베르통언의 공로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견고한 수비뿐 아니라 종반부 중요한 경기들에서 결정적인 골들을 터뜨리며 아약스에 힘을 실어줬다. 그 결과, VI 온라인 투표서 스테켈렌부르흐를 제치고 우승의 일등공신으로 선정됐다. 여기에 시즌 초반의 부진을 털어내고 No.3 자리를 되돌려받은 알더베이렐트, 4월이 돼서야 복귀해 골문을 든든히 지켜준 베르메르도 우승을 차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올 시즌 아약스는 때때로 선수들보다 경영진의 이름이 언론에 더 많이 노출됐을 정도로 다사다난한 한 해를 보냈다. 그러나 역시 선수들 없이는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 없다. 수아레스, 에마누엘손 등 핵심 선수들이 떠나고 감독이 교체되는 와중에도 우승을 거머쥐었다. 그런 만큼 특정 선수의 공로를 알리기보다는 인물 중심으로 10/11시즌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볼까 한다. 선수로 풀어보는 '2011 KAMPIOEN' 아약스, 시작.
반년 만에 해체된 다이나믹 듀오
지난여름 09/10 에레디비지 득점왕 엘 함다위가 아약스에, 그것도 불과 5m 유로라는 저가로 이적했을 당시 리그는 큰 혼란에 빠졌다. 지난 2년간 리그서 40골 이상을 터뜨린 유이한 이들이 아무런 장애물 없이 손쉽게 손을 맞잡았기 때문이다. 특히 수아레스의 다재다능함, 엘 함다위의 킬러 본능은 6개월 만에 해체된 수아레스-훈텔라르-술레이마니 조합보다 더욱 무시무시한 시너지를 낼 것이라는 기대를 받았다.
실제로 두 선수의 시너지는 대단했다. 수아레스는 득점 대신 - 입단 초기 그랬던 것처럼 - 찬스를 만들어내는 데 주력했고 엘 함다위는 이러한 지원 속에 연일 골을 몰아쳤다. 12경기 11골. 일찌감치 득점왕을 예약했고 헤렌벤전 발리슛, NAC전 로빙슛 등 PA에서 역대급 퍼포먼스를 보여주며 대단한 파괴력을 과시했다. 욜 체제의 핵심은 누가 뭐래도 '탈 에레디비지 듀오' 엘 함다위-수아레스였다.
그러나 이 듀오도 결국 6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해체되고 만다. 잦은 징계로 전력을 이탈하는 경우가 빈번했던 수아레스가 리버풀로 떠난 것. 설상가상으로 엘 함다위는 자신을 신임하던 욜이 떠나면서 입지가 급격히 변하고 말았다. 신임 감독 데 부르와 전술적 견해로 충돌, No.9 자리를 심 데 용에게 내주는 수모를 당했다. 백조에서 미운 오리새끼로. 그는 마치 6개월 전 AZ를 떠날 때처럼 그렇게 아약스에서 잊혀지고 있다.
프랭키의 아이들, 아약스를 바꿔놓다
아약스는 프랭키의 취임과 함께 많은 것을 얻었다. 그중에서도 두드러진 것은 유스의 부활이다. 사실 근년의 아약스는 '유럽 최고의 유스를 자랑하는 클럽'이라는 타이틀이 무색할 정도로 유스를 등한시했다. '7년 무관'이라는 불명예스러운 타이틀이 이들을 조급하게 만든 것. '유스의 질이 떨어진 것이 아니냐'는 비평도 따랐다. 그러나 그들이 팀을 떠나 리그서 남긴 족적들을 보면 이러한 질문에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유스 감독에서 승격된 프랭키는 달랐다. 부임과 함께 유스 선수들을 등용, 새판을 짰다. 이 과정에서 에릭센, 에베실리오, 보일리센 등 A1 시절 제자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꿰찼다. 욜 체제에서 겉돌던 에릭센은 프랭키 취임과 함께 No.10을 꿰찬 뒤 재능을 만개, 역전 우승에 기여했다. 한편 에베실리오와 보일리센은 혜성같이 등장, 수아레스와 에마누엘손의 공백을 메우며 새로운 희망으로 떠올랐다.
이 밖에도 욜 체제서 설 곳을 잃어 이적까지 고려했던 블린트, 미래가 불투명했던 외스빌리스가 당당히 A팀의 일원으로 자리를 잡았으며 카스티욘, 루코키, 로드니 스네이더, 오버톰 등이 A팀 훈련에 합류하는 신선한 장면도 자주 연출됐다. 하지만 무엇보다 반가운 것은 이것이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청사진이라는 점이다. 어쩌면 2011년은 아약스 유스의 부활을 알리는 해로 기억될지도 모르겠다.
아약스를 지킨 수호신
10/11 아약스 최다 득점자는 엘 함다위. 그는 리그서 13골을 넣었다. 이는 클럽 역사상 손꼽힐 만한 저조한 기록이다. 그럼에도 아약스는 우승 접시를 들어 올릴 수 있었다. 이는 전적으로 수비의 힘이다. 사실 전반기에는 09/10 후반기에 보여준 조직력을 재현해내지 못했다. 그럼에도 우승권에서 경쟁할 수 있었던 것은 '올해의 선수' 산정 점수서 압도적으로 1위를 질주하던 스테켈렌부르흐의 활약 덕택이었다.
사실 근년의 아약스는 수비 불안 때문에 우승을 눈앞에서 놓치는 경우가 많았다. 헤이팅하가 '올해의 선수'에 선정되고 스테켈렌부르흐가 연일 선방을 펼친 07/08시즌에도 동료가 도와주지 못해 많은 골을 내줘야 했다. 그러나 프랭키가 지휘봉을 잡은 뒤 수비는 급격히 안정됐고 스테켈렌부르흐의 클린-시트 횟수는 급속도로 쌓여갔다. 13회. 8경기나 결장했지만 미하일로프도, 이삭손도 그의 기록을 따라잡진 못했다.
베르통언의 공로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견고한 수비뿐 아니라 종반부 중요한 경기들에서 결정적인 골들을 터뜨리며 아약스에 힘을 실어줬다. 그 결과, VI 온라인 투표서 스테켈렌부르흐를 제치고 우승의 일등공신으로 선정됐다. 여기에 시즌 초반의 부진을 털어내고 No.3 자리를 되돌려받은 알더베이렐트, 4월이 돼서야 복귀해 골문을 든든히 지켜준 베르메르도 우승을 차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