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ranje

네덜란드 여자축구, 새끼사자가 밀림의 왕이 되기까지

낑깡이야 2017. 8. 11. 16:35

화려한 오렌지색을 자랑하던 네덜란드가 까맣게 썩어가고 있습니다. 유로 2016의 악몽이 떠오르는 2018년 월드컵 본선 진출의 어두운 행보, 네덜란드의 기대를 한 몸에 받던 초특급 유망주의 안타까운 일, 17/18시즌 시작부터 유럽대항전에서 들려오는 안 좋은 소식까지. 도중 아약스의 15/16 유로파리그 준우승이라는 쾌거도 있었지만 대부분 나쁜 소식이 언론의 1면을 채워졌습니다.

그러나 이 와중에 네덜란드 전역을 들뜨게 하고 환하게 웃게 만드는 일이 벌어졌죠. 바로 네덜란드 여자 대표팀이 자국에서 벌어진 UEFA 위민스 유로 2017의 정상에 오른 것. 네덜란드 여자 축구 최초의 메이저 대회 우승! 여러 역사를 써내려 왔던 남자 대표팀과 비교하면 보잘것없던 팀이 그야말로 ‘사고’를 친 셈입니다.

불과 2005년까지만 해도 단 한 번도 메이저 대회 본선에 진출한 경험이 없던 이들이 10년 만에 어떻게 이렇게 변할 수 있었을까요. 이번에는 그 자취를 함께 따라가 보는 시간을 가져볼까 합니다.

새끼사자의 작은 울음
1971년, 프랑스와의 A매치를 통해 여자 축구의 시작을 알렸던 네덜란드, 이후 30년간의 행보는 별 볼 일 없었습니다. 1987년 유럽선수권부터 꾸준히 메이저 대회의 문을 두드렸으나 결국 여러 강호의 들러리일 뿐이었죠. 사실 이렇다 할 지원이 없었고 변변한 리그조차 없었으니 무언가가 일어나기 어려운 환경이었습니다.

그러던 2007년, 네덜란드 여자 축구계에도 격변의 바람이 붑니다. 에레디비지 브라우벤(우먼), 즉 여성 프로 리그가 출범하게 되죠. AZ 알크마르, 빌렘 II, 위트레흐트, ADO 덴 하흐, 트벤테, 헤렌벤, 단 6팀이 참가하는 소규모 출범이었지만 이러한 노력은 곧 성과를 드러냅니다. 2년 후, 핀란드에서 열린 위먼스 유로 2009에서 4강에 오르는 신화를 달성하게 되죠.

네덜란드 여자 축구계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베라 파우가 이끄는 이 팀은 남자 축구와는 다른 끈끈한 조직력과 단단한 수비로 새로운 역사를 썼습니다. 이러한 성과에 네덜란드 여자 축구계는 다양한 시도와 꾸준한 투자로 힘을 키워갔습니다. 이 과정에서 벨기에와 통합한 BeNe 리그를 출범해 3시즌 동안 운영했었고 2002년에는 아약스와 PSV 에인트호벤(FC 에인트호벤 통합팀)의 참가를 이끌어내기도 했죠.

성장통을 겪다
그렇다고 네덜란드 여자 축구계에 밝은 소식만 있었던 건 아닙니다. 2000년대 후반, 혜성처럼 등장하며 여자 축구계의 거물이 되리라 평가받던 FW 카린 스테븐스는 운명의 장난인지 마치 마르코 반 바스텐이 그랬던 것처럼 부상으로 커리어를 일찍 마감하게 되는 불운을 겪게 됩니다. 당시 여자 대표팀은 누가 봐도 수비적인 팀이었고 그런 팀에서 스테븐스의 공격적 재능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컸기에 더욱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유로 2009 4강으로 잔뜩 자신감에 차 있던 그녀들은 2011년 본선 진출 실패로 또 한 번의 좌절을 맛보게 되죠. 수비적인 운영은 한계가 있기 마련이었고 그 중심축에 있던 선수들이 부상 및 노쇠화로 기량까지 꺾이면서 그녀들을 큰 산 앞에서 주저앉게 했습니다. 유로 2013도 본선에는 올랐지만 크게 다르지 않았고 참가에만 의의를 둔 채 네덜란드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마침내 이빨을 드러내다
그리고 돌아온 2015년 월드컵, 네덜란드는 프로 출범과 함께 자신들의 손으로 길러낸 선수들을 전면에 내세우며 과감한 도전에 나섭니다. 17세에 헤렌벤 소속으로 무려 41골(26경기)을 터뜨리며 자국 무대를 평정했던 FW 비비안 미데마, 또 다른 헤렌벤의 보물로 평가받던 MF 리케 마르텐스 등 어린 선수들이 축이 됐는데도 주눅 들지 않고 토너먼트 진출(16강)이라는 성과를 냅니다.

사실 대회 참가 전부터 좋은 기운이 맴돌았던 건 바로 1년 전, U19 유로 2014에서 우승을 차지했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그 대회에서 초특급 유망주 FW 미데마는 동년배 선수들과는 격이 다르다는 걸 보여주며 MVP와 득점왕을 석권했죠. 이 대회는 네덜란드 여자 축구계에 메시아, 새로운 반 바스텐이 나타났음을 알리는 계기이기도 했습니다.

돌아가서 2015년 대회가 무엇보다 의미 있는 것은 ‘색이 바뀌었다’는 점입니다. 그동안 경기만 치르면 대부분 수세에 몰리고 버티는 데 급급했던 네덜란드 여자 축구가 이 시기를 기점으로 과감하고 공격적인 자세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는 앞서 언급한 선수들의 무서운 성장세와 여성 프로 리그 출범 당시부터 여자 축구의 발전을 위해 힘쓴 사리나 비흐만 감독의 지도력이 큰 힘을 발휘했죠. 비록 굵직한 성과가 있었던 것만은 아니지만 네덜란드 여자 축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은 계기가 됐습니다.

새끼사자, 밀림의 왕이 되다
잠시 2014년으로 돌아가 보죠. 유로 2017의 개최지로 네덜란드가 결정됐을 때 네덜란드 여자 축구계는 크게 기뻐했습니다. 빠른 성장세를 보이던 그녀들의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고 여자 축구의 붐을 일으킬 좋은 기회가 생겼으니까요. 단순히 기뻐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스페인-포르투갈 전지훈련과 네덜란드에서의 마무리 훈련 및 5차례 평가전을 통해 대회 준비를 철저히 준비했고 대회 직전 엠블렘도 암사자로 변경하면서 각오를 다졌습니다.

이 덕분일까요. 출발부터 좋았습니다. 덴마크-벨기에-스웨덴을 격파하면서 조별리그를 전승, 선두로 돌파했죠. 마르텐스-미데마-반 데 산덴을 앞세운 공격 축구로 상대를 강하게 압박했고 그에 걸맞은 결과까지 냈습니다. 홈 이점이 있었다고는 하나 종전의 네덜란드 여자 대표팀에게선 볼 수 없었던 모습이기에 팬들은 더욱 환호했죠.

이 기세는 토너먼트까지 이어졌습니다. 강력한 우승후보 프랑스를 격파하고 올라온 잉글랜드를 3대0으로 완파하더니 또 다른 우승후보 독일을 꺾고 재회한 덴마크에 4대2로 역전승하면서 우승을 차지했죠. 2년 전, 월드컵 당시만 해도 애송이였던 FW 마르텐스는 ‘로벤’을 연상케 하는 활약으로 대회 최고의 선수에 선정됐고 토너먼트에서 침묵했던 FW 미데마도 토너먼트 전 경기 득점으로 이름값을 했죠. 그녀들은 이렇게 대회를 축제로 만들었습니다.

여축전성시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유로 2017 우승은 네덜란드 축구사에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큰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남녀를 통틀어도 메이저 대회 우승이 한 차례에 불과할 만큼 네덜란드의 축구사는 불운과 아쉬움으로 점철된 것이었으니까요. 어쩌면 이 우승이 여자축구사의 전환점이 될 수도 있겠죠. 그러니 이것이 종착점은 아닐 겁니다. 그만큼 네덜란드 여자축구는 빠르게 성장하고 있고 밝은 미래를 예고하고 있습니다.

당장 선수들이 큰 무대로 뻗어가고 있다는 사실에서 이를 예감할 수 있습니다. 바이에른 뮌헨의 얼굴이었던 FW 미데마는 16/17 챔피언스리그 득점왕 타이틀을 안고 아스널로 건너갔고 MF 마르텐스는 대회 직전 바르셀로나 이적이 확정돼 화제의 중심에 서기도 했죠. 그뿐 아니라 대회 최고의 스타로 떠오른 MF 재키 흐루넨, 공격 첨병 역할을 한 FW 샤니스 반 데 산덴도 명문의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이렇게 쏟아지는 관심과 소속팀의 면면이 네덜란드의 달라진 위상을 말해주고 있죠.

자국 리그와 해당 리그에 소속된 클럽들도 투자와 지원을 꾸준히 가져가면서 유지 그리고 발전에 힘쓰고 있습니다. 때마침 16/17시즌에 팬층이 가장 두터운 아약스가 창단 5년 만에 리그와 KNVB컵을 석권하면서 여자 축구에 대한 관심도 점차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네덜란드 여자축구의 성장을 지켜보는 것만큼 흥미로운 일은 없을 겁니다. 지금부터라도 저와 함께 그녀들이 새길 발자취를 따라가 보시는 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