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NSLATE

아약스가 세상을 지배했을 때 : 반 할이 어떻게 영광스러운 제국을 만들었는가

No.9 KJH 2019. 5. 21. 20:11

 

사상 최강의 아약스는 요한 크루이프가 지휘했던 1970년대일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기억 속에 강하게 각인된 시대가 또 있다.

루이 반 할 아래서 유망주들이 강렬한 인상을 남긴 바로 그 시즌이다.

Text by Alec Fenn

포포투

 

축구의 이상향

 1995년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전날 밤이었다. 아들의 경기를 앞둔 리드비나 클루이베르트는 꿈에서 교체 출장해 결승골을 넣는 아들을 보았다. 너무나도 선명했던 그 꿈을 아들에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그 날 밤 그녀의 꿈은 현실이 되었다. 5만명이 바라보는 결승전 경기장, 벤치에서 등장한 18세 스트라이커는 밀란을 상대로 결승골을 넣었다.

 

 양 팀 선수 명단을 살펴보면 리드바나의 꿈이 이루어지는 것은 어려워 보였다.. 당시 아약스는 다비즈 22세, 세도르프 19세, 리트마넨 24세 등 유망주가 주축이었고 그중13명이 유스출신이었다.

 한편 밀란은 직전 시즌 바르셀로나를 4-0으로 제압하였고, 7년 동안년동안 3번 유럽을 호령하였다. 26세 미만 선수는 1명뿐. 드사이, 보반, 렌티니 등 거액의 이적료로 선수들을 모았다.

 

 놀라운 결과였다. 그보다 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아약스가 펼친 축구였다. 패스, 스프린트, 페인트, 슛 모두 의도된 플레이였으며 화려했다.

 「아약스는 단순히 1990년대를 대표하는 팀이 아니다. 그들은 축구의 이상향에 도달했다. 그들의 스타일은 우아하면서 피지컬적으로도 뛰어났다.」 당시 레알 마드리드 감독이었던 호르헤 발다노의 말처럼 그들은 예술적인 축구로 빅클럽들을 제압했다.

 

 대체 누가 이 팀을 만들었는가? 요한 크루이프가 아니다. 이때 아약스의 새로운 시대를 창조한 인물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었다.

 

 

스포츠 사이언스

 1991년 9월, 당시 41세였던 루이 반 할은 레오 벤하커의 후임으로 아약스 감독이 되었다. 어시스턴트 경력은 있었지만 감독으로서는 아직 검증이 되지 않은 그를 팬들이 환영하지 않았다. 네덜란드의 텔레흐라프는 반 할을 예의 없는 사람이라 불렀으며 클럽의 상징인 크루이프 복귀 운동마저 벌였다.

 

 그래도 반 할이 내건 이상은 누구보다도 높았고, 명확했다. 그의 철학은 명장 리누스 미헬스가 아약스에서 1970년대에 확립한 토털 축구의 진화판이었다. 각각의 선수가 다양한 역할을 소화해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진형을 유지하고 조직적으로 빠른 볼을 컨트롤한다. 테크닉은 물론 전술이해도와 신체능력이 요구되는 시스템이다.

 

 이 전술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재능만이 아니라 자기희생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시스템에 적응할 수 있는 선수를 기르기로 했다.

 

 반 할은 3명의 전문가를 초빙해 다른 분야의 노하우를 축구에 접목시키는 획기적인 방법으로 선수 육성에 착수했다. 하키계에서 성공한 생리학자 요스 게이젤은 장거리 달리기를 줄이고 단거리 스프린트를 중시했다. 농구선수 출신인 러닝 코치 라즈로 얌보르은 런닝 기술과 풋워크, 근육의 사용법을 지도했고 시합에서도 코치로 벤치에 앉았다. 그리고 가장 유니크한 훈련법은 레네 웜하우트였다.

 

 운동 강도와 컨디셔닝을 전문으로 하는 웜하우트는 미식축구 팀을 거치고 아약스로 왔다. (2012년까지 코치로 있었고, 현재는 네덜란드 국가대표팀 스탭이다). 테이블에 놓인 컴퓨터 화면에는 예전 영상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약스가 1995년에 유럽 정상을 차지하기 몇 개월 전 영상이었다.

 

 화면 속에서는 선수들이 스킵 운동을 하고 있었다. 어떤 영상에서는 젊은 시절 반 데 사르가 점프하면서 5개의 상자를 뛰어넘고 있었다. 30초가 지나자 웜하우트가 나타나 유로피트 음악에 맞춰 에어로빅 같은 댄스를 지도하기 시작했다.

 프랑크 레이카르트, 데 부르 형제 등 호화로운 멤버들이 타이밍에 맞춰 스텝을 밟으며 에어로빅을 개시했다. 그리고 턴 동작 후 리듬에 맞춰 박수를 쳤다. 마지막엔 점프하고 헤딩하는 연습을 반복. 선수들은 환성을 지르며 하이터치로 레슨을 종료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LFR8nUtYFQY

 

 웜하우트가 말한다 「독자적인 트레이닝을 하면 피지컬적인 면에서 다른 팀과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축구 에어로빅을 만들어냈다. 우리는 이 트레이닝을 4년간 지속했다」

 이 댄스 레슨은 선수들에게도 호평이었던 모양이다. 로날드 데 부르 「그건 사실 꽤 즐거웠어요. 그 운동 덕분에 우리는 유연성과 빠른 발놀림을 갖출 수 있었죠. 반응속도도 빨라지고 밸런스도 좋아졌고요. 우리가 하는 축구의 기술훈련과도 잘 맞았어요.」

 

 웜하우트는 다른 축구 이외의 운동을 경험한 선수가 높은 운동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리트마넨의 어린 시절. 그는 14세에 아이스하키와 축구를 병행했다고 했어요. 그래서 어린 선수들에겐 여러 가지 스포츠를 경험하는 것을 추천했고, 축구에선 나오지 않는 움직임을 연습에 추가했어요」

 트레이닝 효과를 측정하기 위해 선수들에게 심박수측정기를 달고, 체지방 체크 횟수도 늘렸다. 아약스는 지구력이 11류 선수의 조건이던 시대에 본격적으로 스포츠 사이언스를 맞이했다.

 

 

매뉴얼을 이해 못 하는 선수는 내 팀에 필요 없다

 반 할은 신체훈련만이 아니라 매뉴얼을 읽히고 세세한 전술론을 교육했다. 그에겐 선수들은 개인이 아니라 집합체다. 그들은 각자 임무를 수행하는 것으로 개인의 욕구를 억누르고 팀에 이익을 가져다 줄 필요가 있다.

 

 축구는 팀 스포츠이고, 선수는 서로의 팀메이트다」. 당시 반 할은 이렇게 이야기했다. 「자신이 수행할 일을 하지 않는 선수가 있으면 동료가 고생한다. 그래서 전원이 전력을 다해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 그것을 위해 규율이 필요하다」

 

 그 의무는 포지션에 따라 달라진다. 1명이 공을 받기 위해 뒤로 나오면 다른 선수가 상대 수비진 뒤로 뛰어간다.. 골키퍼에겐 볼을 다루는 기술이 필요하며 정확한 패스로 공격의 기점이 된다. 팀 전체가 패턴화 된 운동성으로 4-3-3- 혹은 3-4-3의 진영이 반복된다.

 

 반 할은 선수들에게 자신의 지시를 빠짐없이 지키게 하기 위해 리허설 같은 훈련과 움직임을 반복시켰다.

로날드 데 부르 - 「우리 팀가능한 한 빠른 속도로 패스해야 돼요. 패스 빨리 보내기 시합인 줄 알았어요. 그리고 30미터 롱패스도 계속 연습했죠. 그래서 빠른 사이드 체인지가 가능해졌어요. 다른 훈련도 했죠. 6vs3 미니게임이면 6명에겐 2터치만 가능하게 했죠. 그런 훈련을 철저하게 한 결과 우리의 포지셔널 플레이는 비약적으로 좋아졌어요. 이적해온 선수들은 우리 훈련을 처음 보면 좀 당황해하더군요.」

 

 반 할의 매뉴얼을 이해하지 못하는 선수에게 자리는 없었다. 89-90 시즌 네덜란드 최우수선수에 뽑힌 얀 바우터스, 어린 빔 용크에게 주전을 빼앗기고 바이에른으로 방출되었다. 개인기로 팬들을 즐겁게 하던 브라이언 로이도 「축구 지능이 부족하다」는 반 할의 판단에 의해 1992년 이탈리아의 포지아로 방출되었다. 반 할은 로이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더 이상 로이를 신뢰하지 않는다. 개인훈련으로 모든 방법을 동원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그는 팀을 위해 달릴 수 있으나 팀을 위해 생각하지 못한다. 이 이상 그를 성장시키는 건 불가능하다」

 

 반 할은 이상을 좇기 시작했다. 91-92 시즌에는 개막 이후 16시합 승점 20점을 기록했다. 그래도 그는 자신의 방법을 관철시켰고 시즌이 끝날 때는PSV에 33점 차까지 따라잡았다. 그리고 UEFA컵에서는 토리노를 제압하고 우승했다.

 하지만 이 성공에는 대가가 따랐다. 세리에A세리에 A의 부자클럽들이 핵심 선수(베르캄프, 용크 - 인테르, 반트 쉽, 빙크 - 제노아, 크리크- 파도바)들을 데려갔다.

 

유망주와 베테랑의 조화

 반 할은 매 시즌 팀을 새로 만들었다. 멤버가 크게 바뀐 92-93시즌은 KNVB컵 결승에서 헤렌벤을 6-2로 제압하고 타이틀을 획득했지만 연패를 노린 UEFA컵에서는 준준결승 프랑스의 오세르에게 패배. 리그도 3위에 머물렀다. 그래서 남은 유망주들은 3년에 걸쳐 반 할의 교육을 받고 위대한 팀으로 변신하고 있었다.

 

 외견은 고등학생과 다름없지만 축구에 관해서는 프로였다. 어느 날에 연습에서 로날드 데 부르는 농구의 스크린을 축구에 접목하자고 제안했다. 코너킥에서 상대 수비를 블록 해서 우리 선수를 프리 상태로 만드는 전법이다. 로날드 데 부르는 상대 선수를 블록 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이것에 감명받은 감독은 바로 팀에 도입했다. 선수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며 반 할은 팀에 창조성을 더한 것이다.

 

 다음 시즌 아약스는 3년 만의 리그 우승을 달성한다. 하지만 반 할의 개혁이 진정한 의미에서 열매를 맺은 것은 94-95시즌이다. 2년째를 맞이한 은완코 카누와 피니디 죠지가 퍼즐의 마지막 조각이 되어 리그 무패우승을 달성했다.

 

 그들은 챔피언스리그에서도 돌풍을 일으켰다. 조별리그에서는 전시즌 우승팀 밀란을 홈에서 2-0, 그리고 원정 산 시로에서 같은 점수차로 승리했다. 1차전 이후 아약스의 어린 선수들은 유니폼을 교환하기 위해 밀란의 대기실에 찾아가 줄을 섰다. 로날드 데 부르도 그 중 한명이었다. 「루드 굴리트가 우린 안내해줬어요. 우린 어린아이들처럼 들떠있었죠. 하지만 2차전 또다시 밀란을 제압한 이후 유니폼을 교환하러 간 선수는 한명도 없었어요」

 

 프랑크 데 부르는 그것이 전환점이었다고 한다. 「유망주와 베테랑사이에서 환상적인 조화가 일어어요. 우리는 밀란을 두번이나 제압했으니 이제 아무것도 무섭지 않다 라는 게 확 와닿았어요」

 

 아약스의 강점은 팀의 완성도만이 아니라 선수의 만능성에 있었다. 반 할이 헌신성을 높이 산 다비즈는 이런말을 한 적이 있다.

「데뷔 당시 나는 레프트윙, 세컨톱으로 뛰었었다. 중미 포변은 반 할의 아이디어였다. 감독은 나에게 중미의 재능을 보았다. 오베르마스가 레프트윙에서 활약하기 시작한 것도 이유였을 것이다. 나에겐 레프트윙보다 공을 더 많이 건드릴 수 있는 중앙미드필더가 맞았다」

 

 조별리그 무패로 토너먼트에 진출한 아약스는 준준결승에서 하이두크를 합계 3-0, 준결승에서 바이에른을 큰 점수차로 제압하고 시즌 3번째 밀란전을 맞았다.

 

 반 할은 밀란이 PSG을 이기고 올라온 것에 기뻐했다고 한다. 「밀란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승리를 원하는 팀이지만, PSG는 다르다. 지지않는 축구를 상대하는 것은 힘들다」

 

 

 아약스와 밀란의 경기장밖 풍격은 대조적이었다. 결승전 전날밤 빈 국제공항에서는 아약스의 유망주들이 쑥스러워하는 듯 언론 앞에 나섰다. 한편 스타들이 즐비한 밀란은 아름다운 여자친구를 거닐고 다녔다.

 

 당시 밀란을 이끌던 파비오 카펠로는 조별리그에서 2번 패배한 아약스를 분석해 대응전술을 마련했다. 드사이를 리트마넨에게 붙이고 포워드인 마사로는 프랑크 데 부르가 아니라 라이지허에게 공이가도록 압박했다. 전반 45분간 밀란의 전술은 완벽하게 들어맞았고 아약스는 괴로워했다.

 

 0-0에서 맞이한 하프타임. 먼저 말을 꺼낸 건 밀란에서 5시즌을 보내고 아약스로 돌아온 레이카르트였다. 「좀 더 공을 잘 간수하고, 빠르게 패스를 보내!」거기에 대니 블린트, 세도르프, 로날드 데 부르가 판전해 의론이 일어났다.

 

 반 할은 전술을 바꿨다. 레이카르트의 위치를 5미터정도 내리고 패스를 좀 더 쉽게 보낼 수 있게했다. 그러자 시합의 흐름이 점점 아약스로 넘어갔다. 거기에 53분 세도르프를 카누로 교체. 카누의 스피드를 경계한 바레시는 밀란의 최종라인을 내렸다.

 

 이렇게 아약스가 공격하기 시작하자 반 할은 70분에 리트마넨을 빼고 클루이베르트를 투입했다. 15분 후 물흐르는 듯한 공격에서 클루이베르트가 세바스티아노 로시가 지키는 골문에 결승골을 넣었다. 이렇게 아약스는 크루이프 시대 1973년 이래 유럽을 정복했다.

 

피딩클럽의 숙명

 아약스의 성공은 전유럽의 주목을 받았다. 18세 클루이베르트는 네덜란드에서 국민의 연인이 되었다. 하지만 3년전과 마찬가지로 유럽의 빅클럽이 핵심선수를 빼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가장 주목을 받은 것은 리트마넨이었다. 하지만 그가 잔류를 선언하자 다른 선수들도 잔류를 결단했다.(세도르프는 삼프도리아로 갔다).

 

 95-96시즌 아약스는 유럽수퍼컵에서 우승하고 좋은 시작을 끊었다. 아약스의 황금시대는 앞으로도 계속될것만 같았다. 하지만 뒤에서 조금씩 붕괴가 시작됐다. 밀란과의 결승전 4개월 후 클루이베르트는 교통사고에서 사상자를 냈고, 그 죄책감에 휩싸였다. 피니디 죠지는 나이지리아에 있는 형제가 총격으로 사망하여 비탄에 잠겼다.

 

 이후 그레미우를 이기고 월드챔피언이된 아약스는 인터컨티넨탈컵에서 오베르마스가 큰 부상을 당했다. 그래도 남은 전력으로 유벤투스와의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 임했지만 과거 2년 중 최악의 퍼포먼스를 보이며 승부차기끝에 패배했다.

 

 1995년에 도입된 보스만 판결에 의해 선수들은 자유롭게 이적할 수 있게되었고 아약스는 해체되었다. 다비즈와 라이지허는 자유계약으로 밀란, 피니디 조지는 레알 베티스로, 카누는 인테르로 이적하였다. 남은 멤버로 구성된 팀은 96-97시즌 리그 4위의 성적만을 남겼다. 이후 클루이베르트가 자유계약으로 바르셀로나로 떠났다. 그리고 반 할도 스스로 막을 내리는 듯 바르셀로나로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