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ranje

명장의 안일한 대응이 부른 참사

낑깡이야 2014. 10. 14. 05:47
아드 데 모스 감독(前 아약스) "히딩크 감독은 당장 수건을 던져야 한다."
 

R.데 부르(전 아약스/네덜란드 대표) "히딩크의 시대는 끝났다."

네덜란드가 '다시' 이변의 희생양이 됐습니다. 이번엔 아이슬란드였습니다. 0대2 완패. 이젠 동네북 신세네요. 그야말로 아이슬란드의 손바닥에서 놀아났다고 할 만큼 졸전이었습니다. 사실 카자흐스탄전, 아니 체코전부터 계속 징조를 보이고 있었지만 '그래도 회복하겠지...'라고 생각했는데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네요. 
상대는 골든 제너레이션의 포르투갈과 전성기의 아일랜드가 아닌, 너덜너덜해진 체코와 이제 기지개를 켤랑말랑하는 아이슬란드입니다. 아이슬란드 전성시대? 네덜란드는 불과 3~4개월 전, 월드컵 3위를 차지했던 팀이라는 걸 생각해야죠. 어떤 형태로든 용납이 가지 않는 결과입니다.
 

출발부터 잘못됐던 감독 선임 작업
일단 애초 히딩크의 선임을 반대했던 쪽이라는 걸 먼저 밝히고 얘기를 풀어가겠습니다. 애초 KNVB는 반 할 감독의 후임으로 쿠만 감독을 낙점했으나 잘못된 방식이 그의 자존심을 건드렸습니다. 코치로 히딩크 감독을 보좌한 다음, 2018 월드컵을 이끌어달라고 말이죠. 아니,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감독 경력이 10년도 넘는 베테랑에게 코치직을 제안한단 말입니까. 98 월드컵때 했던 걸 16년이 지난 지금 다시 제안하니 웃긴 노릇입니다. 이러한 계획이 어긋나니 쿠만 대신 블린트를 택한 것도 참 우습고요. 당장도 문제이지만 히딩크가 떠난 뒤 2018년은 더 걱정입니다.

4년 뒤 걱정은 그때가서 하기로 하고. 일단, 가교로 히딩크 감독을 택한 것도 저는 실수라고 봅니다. 2010년을 끝으로 그에게선 과거의 냉철하고 매서운 용장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됐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러한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고 봅니다. 물론 '히딩크 감독은 시간이 흐를수록 진가를 드러내는 인물이다'라고 반론할 수도 있습니다. 저 또한 오랫동안 그를 지켜봤기에 그러한 특성을 모르는 바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의 히딩크 감독은 잘못된 길로 들어섰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잘못된 길로 들어섰다는 걸 모르고 있다는 점입니다.

안일한 준비, 참사는 예견됐다
지난 4경기를 보면서 든 생각은 '히딩크는 왜 이렇게 안일하게만 대처하고 있는가'였습니다. 
4경기만으로 판단하는 건 섣부를 수도 있지만 이 정도면 그림이 나오기도 합니다. 제 생각엔 일단 성공적이었던 월드컵의 흐름을 이어가는 걸 중요하게 여긴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반 할의 시스템도 채용해보고 선수 조합도 큰 변화를 주지 않았겠죠. 그러나 여기서 나무만 보고 숲은 보지 않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반 할이 예선에서 어떤 전술로 팀을 이끌었는지는 돌아보지 않고 본선에서의 모습만으로 판단해서 팀을 만들었다는 거죠. 그것이 팀의 조직이 어긋나게 된 첫 번째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공격이 이름값을 못한다', '전술로 메웠던 수비수들의 부족한 실력이 드러나고 있다' 등 여러 말들이 많지만 제가 생각하는 이 팀의 가장 큰 문제점은 중원을 그대로 내버려뒀다는 겁니다. 반 할이 쓰레기통 직전까지 가져갔다가 부상자 속출과 전술 변화로 어쩔 수 없이 재활용해야 했던 스네이더-N.데 용 카드를 오히려 전면에 내세웠단 말이죠. 
나이젤 데 용은 후방에서 수비에만 전념하고 있고 스네이더는 후방에 내려와서 킬패스를 찌를 틈만 살피고 있으니 경기가 만들어질 수가 없습니다. 이러니 중원에서 볼을 점유하고 경기의 주도권을 쥘 리도 없습니다. 수비하는 쪽에선 이보다 편할 수 없죠.

저는 반 할 체제가 유일하게 이루지 못한 중원의 세대교체를 이 기회에 단행했어야 했다고 봅니다. 클라센-블린트(클라시)-페르(스트로트만)이 후보군이 되겠네요. 이건 경험의 문제가 아니라 조합의 문제란 말이죠. 미드필더 3인이 경기를 제대로 풀어줘야 공격도, 수비도 한결 수월해지는 데 지금 네덜란드는 이걸 못하고 있습니다. 카자흐스탄전(3대1 승)에 1골 1도움으로 영웅이 됐던 MF 아펠라이의 활약, 아니 애초 발탁부터 탐탁치 않았던 것도 궤를 같이합니다. 그렇다고 무수한 기회를 놓친 공격, 안정감을 보여주지 못한 수비도 책임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 부진의 근원에는 중원이 자리 잡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침묵하는 벤치, 실망스럽다
반 할 체제와 히딩크 체제의 또 다른 차이점은 코치진을 들 수가 있습니다. 반 할 사단은 블린트(총괄)-클라이베르트(공격)-훅(GK)이 조화를 이뤄 분업이 잘 된 팀이었습니다. 물론 반 할 감독 스스로도 사소한 것까지 놓치지 않는 철두철미한 성격이라는 점도 고려해야겠죠. 반면 히딩크 사단은 블린트는 동일하지만 반 니스텔로이(어시스턴트)-로데바익스(GK)가 보좌하고 있는데 여기서 큰 차이를 보입니다. 훅과 로데바익스의 경력과 능력 차이는 얘기할 것도 없습니다. 
반 니스텔로이는 유스와 리저브, 에레디비지 클럽 코치로 숱한 경력을 쌓은 클라이베르트와 비교하면 정말 '초짜 코치'입니다. 히딩크가 흔들릴 때 잡아주고 도와줄 만한 그릇이 못 된다는 거죠.

카자흐스탄전에서 반 페르시와 훈텔라르가 충돌하는 이슈가 있었죠. 이에 언론사 'AD'에선 '과연 반 페르시가 주장 자격이 있는가?'라는 설문을 받았고 '예
(334) 18%', '아니오(1574) 82%'라는 다소 충격적인 그러나 이해가 가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반 페르시의 주장 역량은 뒤로 하고 이러한 팀을 흔드는 이슈가 있었음에도 코치진은 수습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했습니다. 기껏해야 형식적인, 틀에 박힌 발언이 전부였죠. 그러니 아이슬란드전에서도 이 둘의 관계가 봉합될 리가 없습니다. 결국 카자흐스탄전에는 먹혔던 훈텔라르의 투입이 아이슬란드전에선 쓸모 없는 카드가 되고 말았죠.

가장 큰 문제는 누가 봐도 뻔히 보이는 수를 꺼내고 있다는 겁니다. 이탈리아-체코와의 2연전까지만 해도 팀 그리고 선수들의 컨디션을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넘겼지만 그것이 카자흐스탄-아이슬란드와의 2연전까지 이어졌습니다. 베스트 11부터 교체 카드 그리고 상황에 따라 변하는 전술까지 조금만 생각하면 모두 예측할 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아이슬란드전에도 라거벡 감독과의 두뇌 싸움에서 완전히 패했죠. 불과 4년 전이었더라면 오히려 라거벡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요리조리 요리했을 히딩크이지만 2014년의 그 그리고 그를 보좌하는 코치들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로벤에 수비 3명이 달려들고 3선이 그렇게 벌어져 있는데 구경만 하고 있는 모습이란 참.

'명장' 히딩크, 도대체 무슨 생각인가
아이슬란드전도 자극이 안 된건지, 생각을 숨기고 있는 건지 히딩크 감독은 아직 말을 아끼고 있습니다. 인터뷰만 봐선 상황 파악조차 안 되는 것처럼 보일 정도.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냉정함을 유지하지 못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아이슬란드전만 해도 경기를 따라잡고 뒤집을 기회가 충분히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랬다면 오히려 큰 문제를 잡지 못했을 거라는 점에서 저는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본선 가서 수모를 당할 바에야 예선에서 매를 맞고 본선에서 정신을 차리는 게 낫죠. 그런 면에서 24팀으로 출전국이 확대된 이번이 팀을 개편할 절호의 기회인데 현실에 안주하고만 있으니 답답할 노릇입니다.

히딩크로선 하루 빨리 자신만의 색을 보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확실한 방향을 제시하지 못한 채 무색무취의 축구를 한다고 강도높게 비판한 R.데 부르의 분석은 틀린 말이 하나도 없습니다. 히딩크니까 '그래도...'라는 말을 덧붙이며 희망을 가져보는 것이지, 다른 감독이었으면 벌써 경질됐을 수도 있습니다. 하여튼 당장 11월에 있을 멕시코와의 평가전에서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말그대로 '설'에 그쳤던 경질 이야기가 수면으로 떠오를 공산이 큽니다. 저는 이 부진이 자극이 돼 확실하게 세대교체를 단행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축구를 이해하고 그것을 경기에서 구현할 수만 있다면 나이 따위는 상관없는 반 할과 달리 히딩크는 은근히 베테랑의 힘을 중시하는 감독이라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