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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약스, 영광 되찾기 위한 비로드 개혁

No.9 KJH 2012. 12. 1. 00:00

아약스는 최고여야 한다
11월 19일, 반 데 사르의 아약스 커머셜 디렉터 취임이 발표됐다. 1주일 전, 크라이프는 자신의 칼럼에서 '아무래도 아약스에서 나의 역할은 끝난 것 같다'고 개재했다. 그야말로 회사화되어버린 아약스를 풋볼러들의 클럽으로 만들자며 시작한 크라이프의 인사가 이제 완성에 다가선 것을 의미하는 발언이었다.

사건의 발단은 2010년 9월 15일, 레알 마드리드 원정에서 0:2로 패배한 챔피언스 리그였다. 너무나도 엉망인 시합 내용에 '이딴 건 아약스가 아니다. 아약스의 간부들은 모두 책임지고 전원 사퇴해야 한다'고 대비판했다. 그 해 12월 부진의 책임을 지고 마틴 욜이 사퇴했고 다음 해 3월엔 코로넬 회장, 4월에는 반 덴 보흐 제네럴 디렉터의 사퇴도 연이어 결정됐다.

그리고 크라이프 자신은 11월 7일 아약스 이사로 취임했다. 그가 목표로 한 것은 유스 육성 시스템의 쇄신이었다. 당시 아약스 유스 육성 시스템은 1군과 네덜란드에서 많은 선수를 배출한다는 의미에서는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월드클래스라고 할 만한 기량을 가진 선수는 MF 스네이더에서 대가 끊겨 버렸다. "좋다는 것과 최고는 동의어가 아니다. 아약스는 '최고'이어야만 한다"란 크라이프의 생각. 그 의지를 이은 용크, 베르캄프가 9월부터 아약스 유스의 지휘를 맡으며 코치진의 대거 교체가 단행됐다.

아직도 남아있는 소동의 후유증
지도방침은 개인의 육성에 특화되었다. 유스는 결과에 집착하기보다는 공을 많이 소유해 기술을 향상시키는 시간이어야 한다는 것이 크라이프의 생각. 그리고 그것을 베르캄프와 용크가 답습하고, R.데 부르와 로이, 리차드 비츠헤 등 레전드들이 개인 트레이너로서 카테고리를 뛰어넘은 개인 지도를 하고 있다.

그런데 제네럴 디렉터를 둘러싸고 크라이프와 다른 4명의 이사가 분열됐다. 제네럴 디렉터는 즉 아약스의 사장이라고 부를 수 있는 요직이다. 크라이프는 과거 아약스에서 측면 공격수로 활약했던 라 링을 강하게 지지했지만 
에드가 다비즈를 포함한 이사진은 파산 경력, 그리고 클럽의 얼굴로서는 부족한 이름값을 이유로 그 대신 크라이프와 견원지간인 반 할을 옹립했다. 게다가 그들은 실력이 부족하다며 크라이프로부터 소외당한 레전드 블린트를 테크니컬 디렉터로 삼았다.

오베르마스는 '아약스는 2개로 분열되었고 100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소동이 일어나 혼돈에 빠졌다'며 대소동을 회상했다. 블린트가 유스 훈련장에 나타나도 크라이프의 입김이 닿은 베르캄프와 용크는 그와 단 한 마디도 섞지 않았다고 한다.

이 소동은 크라이프 파가 재판에서 승리해 반 할 제네럴 디렉터 취임이 취소되면서 일단락됐다. 이것이 2012년 2월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 사이 아약스는 많은 피를 흘렸다. 반 크라이프 파를 이끈 다비즈는 지도자 자격 취득 연수를 아약스에서 받으려 했지만 베르캄프와 용크에 의해 출입금지 처분을 받았다고 한다. 크라이프 자신도 이 소동 끝에 이사를 사임. 지금은 명예 어드바이저의 입장에 있으며 클럽 인사에 
직접 간섭하지 않게 됐다.

레전드들의 의미 있는 귀환
아무튼 2년 이상이 걸려 크라이프의 ‘비로드 개혁’의 기본이 되는 인사가 완성됐다. 중심인물이 되는 것은 베르캄프, 용크 그리고 감독인 F.데 부르 이상 3인. 한편 6월, 요한 크라이프 협회에서 스포츠 매니지먼트 석사를 취득한 반 데 사르에겐 아에혼(Aegon)을 잇는 새로운 스폰서를 찾는 첫 임무가 주어졌다. 장래 킨스베르헨을 잇는 제네럴 디렉터가 되는 길의 첫발을 내디딘 것. 그리고 오베르마스는 풋볼 디렉터로서 전력 강화를 담당해 오늘도 분주하게 뛰어다니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다. 유스 육성 현장에서 전설들의 귀환이 이루어지고 있다. "바이에른 뮌헨은 베켄바우어, 루메니게 같은 레전드들이 수뇌진을 맡고 있으며 결과를 만들어내고 있다. 견본이 되는 클럽이다"고 크라이프가 언급했던 모양으로 다가섰다. 하지만 '아약스의 진정한 모델은 보루시아 도르트문트가 아닐까!?'란 소리가 나오고 있다.

예를 들면 11월 20일 자 데 텔레흐라프의 '파산에서 우승으로'라는 기사가 그렇다. 1997년에는 도요타컵에서 우승해 세계를 제패했으나 막대한 이적자금을 쓰고 주식시장에서의 실패로 큰 채무를 끌어안으면서 위기를 맞이했었던 도르트문트. 한때 파산 직전까지 갔던 이들은 유스를 주체로 리빌딩에 성공, 10/11, 11/12시즌 2년 연속 분데스리가 정상에 오르며 명예 회복을 일궈냈다. '역시 아약스는 도르트문트형 경영, 보강을 목표로 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골자의 기사였다.

독일 골리앗 넘지 못한 네덜란드 다윗
11월 20일, 아약스는 그 도르트문트와 챔피언스리그에서 맞대결을 펼쳤다. 결과는 1대4 참패. 아약스의 67%란 점유율은 아무 의미도 없었다. 도르트문트는 라인을 낮추고 밀집 지역을 만들어 지켰다. 맨체스터 시티를 괴롭힌 MF 에릭센의 '제로톱' 전술은 도르트문트의 포지셔닝 기술, 피지컬과 스피드, 정확성을 갖춘 수비진에 무용지물이었다. 오히려 상대 팀에서 MF 에릭센과 같은 역할을 하는 MF 괴체는 1골 2도움을 기록. 다른 1골도 기점이 돼 4골 모두 관여하는 대활약을 보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인상에 남는 것은 아군 진영에서 드리블로 아약스의 골대 앞까지 가져갔을 때 보여준 위르겐 클롭 감독의 반응이었다. 조금만 더 갔으면 슛을 쏠 수 있었지만 마지막 터치에서 실수를 범해 아약스 수비진에 막혔다. 이때 클롭 감독은 분해하거나 화내는 것이 아니라 웃음으로 실수한 괴체에게 박수를 쳤다. 그것은 축구를 사랑하는 사람의 표정이었다.

도르트문트는 
아약스를 상대로 점유율이 높았던 것도 아니고 결정적인 찬스를 많이 만든 것도 아니었지만 기술, 파워, 스피드 등 개인의 역량은 아약스 선수들을 능가했다. 그런 그들이 하나의 팀으로 기능, 공수양면에서 아약스를 압도했다. 그리고 괴체와 로이스로 대표되는 재능들이 승부처에서 결정지어줬다. 도르트문트는 아약스가 어떻게 상대할 수 있는 팀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들은 축구를 즐기고 있었다.

독일 챔피언, 아약스의 견본
시합이 끝나고 아약스의 서포터들은 결과에 충격을 받았고 완패를 분해했다. 그러면서도 '도르트문트의 축구는 아약스의 견본이다'며 인터넷 게시판에 글을 남겼다. 다음날 신문에서도 역시 ‘독일의 축구 레슨. 도르트문트는 아약스의 거울’이라고 평했다.

아약스가 진행하는 비로드 개혁은 유스 육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1군 팀이 결과를 만들어낼 때까지 최소 5년은 소요된다.
오베르마스도 '유럽 상위권 팀이 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이라며 각오하고 있다. 유로 2000에서 참패한 독일은 유스 시스템을 근간에서부터 고쳐 나갔고 지금은 대표팀과 각 클럽팀에서 결과를 내고 있다. 유로 2000에서의 실패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독일이 있다고 할 수 있는 셈.

'그날 도르트문트전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 강력한 아약스가 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날은 과연 올 수 있을까.
 
http://sportsnavi.yahoo.co.jp/soccer/eusoccer/1213/holland/text/201211230001-spnavi.html